우체통 속 사람들
글. 이은정(경남 거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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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들에게 글쓰기를 시켜놓고 나도 책상 앞에 앉았다. 비 내리는 잿빛 오후였다. 불행이 비겁하게 떼 지어 달려들었고, 운명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나 억울한 상황에 놓였던 나는 책상에 엎드려 낙서하고 있었다. 내 감정에 휩쓸려 무아지경일 즈음 한 여자아이가 내 등을 톡톡 건드렸다. 쳐다보니,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제스처를 했다.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돌아와 제자리에 앉았는데 그때부터 자꾸만 나를 쳐다보았다. 어서 마무리하라고 일러준 후 창밖을 향해 섰다. “선생님!”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냉큼 돌아보았다. 아까 그 아이가 오른손을 들고 있었다. 아이는 잠깐 망설이다가 물었다.
“선생님 죽고 싶어요?” 나는 깜짝 놀랐다.
순간, 아차 싶었다. 아까 아이가 내 자리에 왔을 때 내가 한 낙서를 보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일부러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빗소리를 들으며 시(詩)를 쓰는 중이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한참 잠잠해졌던 아이가 내 거짓말에 도저히 속아줄 수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죽는 게 나아요. 내일이 되면 죽고 싶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나는 아이의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내가 썼던 낙서는 ‘오늘 죽을까, 내일 죽을까’였다. 아이의 충고는 소크라테스, 니체보다 더 철학적이었고 잔인했으며 놀라웠다. 그리고 동시에 부끄러웠다. 죽을까 말까 고민할 시간에 내일의 희망을 보라는 뜻이었을까. 미래의 어느 날은 죽지 않아 다행이라 여길만한 때가 있을 거란 뜻이었을까. 죽지 않고 살아보니 아이의 말은 사실이었다. 비단 죽음뿐만 아니라 걱정과 고민도 내일이 되면 사라지거나 해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저 시련이 오늘의 몫이라면 내일의 몫인 희망도 제 몫을 다할 수 있도록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 심오한 인생 철학을 초등학생에게 배웠다. 바야흐로 졸업과 입학의 시기다. 새로운 아이들의 인생 철학이 자못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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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나에게 버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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