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회에서는 미사를 시작하면서 가슴을 치며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하고 고백의 기도를 바친다. 이 행위에는 고백은 가슴으로 하는 것임이 암시되어 있다. 고해성사는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죄를 고백하면 자동으로 죄의 용서를 받는 종교행위가 아니다. 고해성사는 나의 잘못을 남의 탓으로 또는 하느님의 탓으로 돌리려드는 인간의 속된 마음을 뉘우치게 하여, 남의 탓으로 돌린 죄의 원인에 알게 모르게 나도 동참하고 있음을 가슴을 치며 고백하는 종교행위다. 가슴을 치며 죄를 고백하는 행위는 세상의 죄를 자신의 탓으로 삼는 자비의 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남을 용서받지 못할 인간으로 취급할 때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가톨릭교회는 내가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그 사람의 탓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지 못하는 나의 탓이기도 하다고 가슴을 치는 것이다. 어디 죄만 가슴을 치며 고백하겠는가. 사랑도 믿음도 우리는 가슴을 치며 고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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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필요 없던 우리 민족의 고백 습관
고백은 마음의 일이어서 사실은 말이 필요 없다. 고백은 인간의 모든 말을 잠재운다. 가슴을 치는 고백은 소리가 없이도 은은하게 상대의 마음을 울리며 오래오래 스며든다. 큰소리로 고백을 요구하는 것은 서구 문화의 영향이다. 우리 한국인에게 이런 고백의 문화는 생소하다. 사실 우리는 “사랑한다”는 언어의 고백 없이 사랑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민족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랑한다”는 고백은 우리에게 쑥스러운 것이었다. 더군다나 “너는 내 것이야”라는 말로 강하게 사랑을 표현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고백을 하지 않으면 상대가 불안해할 정도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사랑과 사랑하는 상대를 물건 고르듯 선택하여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소유물은 언제든지 버릴 수도 바꿀 수도 있다. 소유물처럼 얻은 사랑이나 그렇게 얻은 사람은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팽개칠 수 있다. 소유하기 위하여 이용한 고백은 언제든 인간을 배반하여 인간을 위선과 거짓의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사랑의 고백이 물질로 포장될 때 고백의 모습도 바뀐다. 소유를 벗어난 사랑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서로는 고백의 말이 없어도 온몸으로 사랑을 고백하며 서로의 존재 속으로 스며들어 합일할 것이다. 서구의 고백문화는 어떤 면에서는 사랑도, 믿음도, 종교도 변모시켰다. 그리고 인간을 가볍고 속되게 하였다.
언어의 고백을 넘어 마음의 고백으로
그리스도교는 그 본질에서 우리 한국인의 정서에 가깝다. 그리스도교는 서구인들이 강조하듯 큰소리로 외치는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를 침묵시키는 사랑 위에 세워진 종교다. 그리스도인이 신앙인으로 살고자 하는 이유는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존재로 믿음을 살기 위해서다. 입으로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몸으로 사랑을 살기 위해서다. 용서한다고 말로 고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몸으로 용서와 화해의 삶을 살기 위해서다. 용서니 화해니 사랑이니 하는 말마디에 묶일 때 우리는 남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도, 화해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게 된다. 사랑한다는 고백을 말로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진실한 사랑은 사랑의 고백 이전에 이미 사랑의 사건이되어 일어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배반한 제자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너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7)”하고 세 번이나 물으셨다. 그 때마다 베드로는 “예,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하고 사랑을 고백하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세 번씩이나 반복하여 같은 질문을 던지셨을까? 예수님은 인간의 언어가 만들어내는 고백은 언제든 배반으로 바뀔 수 있음을 알고 계셨다. 그분께서 베드로에게 반복해서 같은 질문을 던지신 까닭은 베드로로 하여금 언어의 고백을 넘어 마음의 고백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사랑은 입술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 반복되는 주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처음에는 슬픔을 느꼈지만 드디어 언어를 버리고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말이 난무한 세상에서 너의 고백이 진실임을 보이기 위하여 먼저 가슴을 치며 너의 언어를 잠재우도록 하라. 언어의 고향에서 사랑을 만나게 되리라. ![](/upload/logo_r[670][698].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