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옹주를 타이른 효종
평소 자기 집이 좁은 것을 불만스럽게 여기고 있던 정숙옹주(貞淑翁主)가 효종에게 아뢰었다.
“이웃집이 가까워 말소리가 서로 들리고 처마가 얕고 드러나서 가리는 것이 없으니, 돈을 주시면 땅을 좀 사겠습니다.”
“말소리는 작게 하면 들리지 않을 것이고, 처마는 가리면 될 것 인데 왜 뜰을 넓힌다는 것이냐? 사람이 거처하는 곳은 몸만 들어갈 수 있는 정도면 족한 것이다. 내가 대나무 발을 내려줄 터이니 그것으로 처마를 가리도록 하여라.”
임금의 말에 정숙옹주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큰 것을 선호하는 경향은 변함이 없다. 집, 가구, 승용차에 이르기까지 무조건 대형(大形)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이면에는 자기 과시욕이 은밀히 자리 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과시욕은 대개 열등감에 비례하여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이 지나칠 경우 파탄의 비운을 초래하기도 한다. 결국 한때의 허황된 마음이 돌이킬 수 없는 불행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내면에 대한 관심보다는 외형에 집착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실의 부박한 흐름에 쉽게 동조하는 것은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표피적인 감각 기능에 의존하여 밑 빠진 욕망의 독에 자꾸 무엇인가를 채우려고만 한다. 그럴수록 삶은 헛헛하기만하고, 욕망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인생이라면 얼마나 허망한 노릇인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족(自足)을 모르고, 필사적으로 밑 빠진 독을 채우려고 아우성이다. 이제 그 헛된 노력을 멈추고, 잠시 돌아보라. 바다는 절대로 제 속을 채우려고 안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언제나 차고 넘치는 충만으로 넘실거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삶의 묘법(妙法)이요 오묘한 지혜이다.
맹 정승과 병조판서
맹 정승의 집은 매우 작고 협소하였다. 하루는 병조판서가 그 집에 갔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퍼부었다. 그러자 천장에서 빗물이 떨어져 자리에 앉아 있던 병조판서의 의관이 다 젖었다.
“정승의 집이 이와 같은데 내가 어찌 바깥 행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병조판서는 이렇게 탄식하고 집으로 돌아와 한창 짓고 있던 행랑을 모두 헐어 버렸다.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는 다른 권문세가들처럼 허세를 부리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많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가 있었지만 맹 정승은 외형의 것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깨끗한 선비로서 한 생애를 일관했을 뿐이다. 정승의 삶을 보고 깨달은 병조판서처럼 우리도 마음속의 허황한 집채들을 헐어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 빈자리에 존재의 향기가 깃들게 하고 삶의 오롯한 기쁨이 들어서게 해야 한다. 넉넉하고 담백한 삶은 언제 보아도 맑고 아름답다. 그 많은 여백에서는 생(生)의 아름다운 무늬가 어른거리고, 도타움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이와 같은 존재의 격(格)은 언제 어디서나 순금처럼 은은히 빛난다.
끝 모르는 사람의 욕심
조선 중종 때의 문신 김정국(金正國)은 당시의 사회 풍조를 지적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집을 크고 화려하게 지어 사는데, 그 거처가 사치스러운 자는 곧 화를 당하게 마련이고, 작은 집에서 검소하게 생활하는 자는 마침내 명예와 직위를 얻게 된다.”
그러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였다. 종실(宗室) 고흥수도 자리에 있다가 김정국의 말에 동조하였다.
“예로부터 큰집은 옥(屋)이라 하고, 작은 집은 사(舍)라 하는데 옥(屋)자는 시체가 이른다(尸至)는 말이요, 사(舍)자는 사람이 길하다(人吉)는 말이니 큰집에 사는 사람은 재앙을 당하게 되고 작은 집에 사는 사람은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고흥수의 말을 듣고 김정국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것은 파자(破字)로 설명한 예언이 될 만하다.”
무조건 큰집을 선호하는 요즘 사람들은 그 일에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하고, 삶의 중요한 목적으로 삼는 듯싶다. 그러나 지나치게 큰집이 재앙을 초래한다는 선인들의 경고를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풍수지리설에서도 면적이 지나치게 큰집은 좋지 못한 집으로 보고 있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사람들의 집의 크기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는 듯싶다.
집, 가구, 승용차 등 그 어느 것도 인간의 욕망을 완벽하게 충족시켜 주지 않는다. 또한 삶의 외적 요소들이 인간의 행, 불행을 결정짓는 절대적인 요소도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본질로부터 일탈된 삶, 이것을 다시 본연의 자리로 다시 되돌리는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