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음악이라 불리는 솔(Soul)을 대신한 음악, 힙합
사회적, 경제적으로 열악한 지위에 있었던 흑인들에게 예술영역, 특히 음악적 자유로움은 그들의 삶을 가장 솔직하게 표현하는 방식이자 삶을 영위하기 위한 일종의 무기로 작용했다. 흑인 인권운동이 전개되던 1960~70년대에는 Soul 음악이 함께 했고, 그 이후 아메리칸 드림이 성행하던 시기에 고립된 삶을 살아야 했던 흑인들의 공동체 형성과 맞물려 랩 위주의 힙합문화가 태동한 것이다. 힙합은 소수자 집단 또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음악으로서 역할을 했다. 그럼, 사회적 배경도 계급적 특성도 우리 현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힙합이라는 음악이 어찌하여 우리 생활에 침투하게 되었을까?
한국 힙합의 1세대로 불리는 교포 출신 래퍼(드렁큰 타이거, 업타운)와 문화대통령으로 불렸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행보로서 힙합이라는 장르를 대중에 선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역사로 치면 20년 안팎의 시간이다.
소위 말하는 ‘대세’ 음악은 아닐지언정 한국의 대중음악에 탄탄한 마니아층을 확보하게 된 이유는 온라인 미디어 환경의 발달로 세계 대중음악의 트렌드와 겹쳐지며 시너지를 발휘하였고 힙합만이 쏟아낼 수 있는 진솔하고 독특한 가사전달이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으로 보인다.
힙합은 기성세대에게는 껄끄러운 음악이다. 필자가 듣기에도 민망하거나 좌불안석하게 만드는 가사가 종종 들린다. 반면에 거리낌 없이 내뱉는 가사가 젊은 세대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대변해 주는 모양이다. 힙합은 관습 내지는 도덕이라는 관념과 대립하는 경우가 많다. 인기라는 상업적 성공을 위해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 있는 말, 없는 말 거리낌 없이 토해내는 진정성 결여에서 오는 대립이 아닐까 싶다.
세계 제일의 춤꾼들, 한국의 비보잉
힙합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한 비보잉(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춤꾼)은 노래 가사 없이 강렬한 비트만 반복적으로 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한 것으로 미국이 본고장이다. 미국의 할렘가에서 목숨을 건 춤판(비보잉에서는 배틀이라 표현함)으로 시작되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전해진다.
국내에서는 길거리 춤꾼이라는 의미로 ‘스트리트댄서’라고 불리며 1980년대 초부터 한국의 비보잉 역사가 시작되었다. 서양인에 비해 열악한 신체조건이나 길지 않은 역사에도 한국의 비보잉이 세계 최고수준의 위상을 얻게 된 것은 무슨 연유일까?
이 역시도 초고속 인터넷 기술의 발달은 빠질 수 없다.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씁쓸한 이면도 있다. 학업과 취업의 족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청년들에게 억압하는 현실의 탈출구 역할을 한 것이다. 비보잉의 발전은 획일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더욱 그 빛을 발하는 것이라 하겠다.
국내 비보잉팀들은 국내외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며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있고(유럽 일부 대회에서는 한국팀이 출전하지 않아 격이 떨어진 대회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서울 홍대인근의 세계최초의 비보이 전용극장에서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는 꾸준한 인기 속에 공연되고 있다.
문화로서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는 비보잉이지만, 비보이에 대한 시선은 달갑지 않은 분위기다. ‘좀 노는 청춘’들 정도로 취급될 뿐, 예술행위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비보잉은 젊은 이들의 꿈을 몸으로 표현하는 추임새라 할 수 있다. 그들만의 문화가 아닌 우리 사회의 문화로 인식될 날을 고대해 본다. 조금은 낯설고 생소한 문화라 할 수 있겠지만,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아이들이 입으로 몸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면 그다지 동떨어진 문화로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