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자의 입장에서 공감을 끌어내다
올 겨울 첫 눈이 흩날리는 11월의 어느 날, 서울의 한 스튜디오에서 이동건 작가와 인사를 나누었다. 머스터드 색 비니를 쓴 개성 있는 모습의 이 작가는 다소 긴장한 듯 보이면서도 차분하게 사진 촬영과 인터뷰에 임했다. 스튜디오 내 소품들과 자연스레 어우러진 이 작가의 포즈에서는 만화가다운 천진함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2011년 국내 유명 포털사이트에 웹툰 <달콤한 인생>을 연재하며 데뷔했다. 싱글 혹은 커플, 직장인과 백수를 가리지 않고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을 법한 캐릭터들의 소소한 일상을 현실감 있게 그려낸 이 작품은 연재 당시 여성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얻으며 그를 단숨에 인기 작가로 발돋움시켰다. 남성 작가가 그린 웹툰에 이토록 여성들이 깊게 공감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달콤한 인생>을 많이 좋아해주셨던 이유를 키워드로 꼽자면 역시 ‘공감’ 인 것 같아요. 연재 초반에는 작가가 여자가 아니냐는 추측도 있을 정도였죠. 남성 작가가 그려내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분들이 많이 좋아해주셨던 이유는 여성들 서로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를 여성 작가가 한 번 더 짚어 주는 맥락이 아닌, 관찰자인 남성이 바라보는 그들의 이야기를 서술한다는 것에서 기존과는 다른 신선함을 주었던 것 같아요.” 그가 최근에 연재하고 있는 작품은 <유미의 세포들>이다. 평범한 30대 직장 여성인 주인공 유미가 자신의 뇌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뇌세포들의 조종을 받으며 살아가는 일상을 그린 이 작품은 올해 여름 비슷한 소재를 주제로 개봉한 미국 디즈니 사의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과도 비견되며 현재 독자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함께 평점 만점에 빛나는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평범한 일상 속 행복은 ‘나에게 주는 선물’
디자인 문구 사업가로 활동했던 이력을 가진 그가 갑작스레 만화계에 뛰어들어 웹툰 작가가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처음에는 제가 만든 문구류를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화를 시작했어요. 문구류 캐릭터로 만화를 그려 홍보하면 좋을 거라는 판단에서였죠. 막상 시작하고 나니 만화의 인기에 비해 홍보효과가 적어서 실망했죠. 웹툰이 인기를 얻으면서 본업을 정리했고 제게는 동명의 캐릭터 상품이 아닌 <달콤한 인생> 이라는 만화만이 남았습니다.” 이렇게 만화가로 살아가는 삶은 어떠한지도 물었다. 유머와 웃음을 주는 만화를 그리며 살아가지만 삶은 그렇게 늘 즐겁지만은 않다고 답했다.
“물론 전보다 좀 더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문득 아쉬워질 때가 있어요. 사무실에서 동료들과 인사하고 점심 먹고, 다른 이들과 소통하는 일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혼자 작업하는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많이 그립기도 해요.”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은 얼핏 단순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기에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행복을 찾는 그만의 방법을 물었다.“연재일인 매주 수, 토요일마다 다가오는 두 번의 마감은 부담이 꽤나 큰 편이에요. 쳇바퀴 돌아가듯 반복되는 마감의 압박에서 벗어날 때마다 스스로에게 선물을 하곤 하죠. 세상에서 나를 제일 잘 아는 내가, 나를 위해 주는 선물도 타인에게 받는 선물만큼 행복하거든요. 물론 순간의 해방감에 도취되어 충동구매를 하게 되는 단점도 있지만 제게 선물을 한 것에 대한 후회는 없어요.”
언제나 따뜻한 <미리내 우체국>
이동건 작가는 지난 2월부터 디지털포스트에 <미리내 우체국>을 그리며 본지와 인연을 맺고 있다. 각 우체국 사업장과 우정사업본부 가족들의 사연을 모아 따뜻한 그림체의 2페이지 만화로 담아내는 <미리내 우체국>은 작업하면서 작가 스스로도 뭔가 모를 훈훈함이 마음을 채운다고 말했다.
“문구 사업을 하던 시절 상품배송을 위해 사무실 근처 우체국을 많이 애용했었는데 우체국에 방문할 때마다 늘 친절하고 따뜻했던 직원분의 얼굴이 지금도 기억에 많이 남아요. 그 때 느꼈던 우체국의 따뜻한 인상이 훈훈한 사연들과 어우러져 만화에 자연스레 녹아드는 것 같아요. 특히 집배원분의 우비를 찾아준 여고생의 이야기가 담긴 9화 ‘주인을 찾습니다’ (본지 10월호)는 그리면서도 미소가 지어지는 사연이었어요.” 라는 말과 더불어 미리내 우체국처럼 언제나 따뜻한 우정서비스를 위해 노력하는 우정가족들에게 감사인사 또한 잊지 않았다.
독자도 함께 그리는 만화
본인의 행복한 기억을 만화로 그려낸다면 어떻게 할지를 묻는 질문에 그는 오히려 조금 힘을 빼고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행복을 표현할 때나 감정을 표현할 때는 조금은 절제하며 그려내고 싶어요. 전하고자하는 것을 전부 표현한 그림은 보는 이에게 여지를 주지 않아 전달력이 부족한 것 같아요. 독자가 직접 장면과 상황을 느끼고 상상할 수 있는, 작가와 독자가 함께 그려가는 만화를 그리는 게 제 소망입니다.”
앞으로의 활동계획을 묻는 질문에 만화가다운 재치를 담아 답했다.
“<유미의 세포들> 속 주인공 유미의 프라임세포(주인공의 뇌세포 중 가장 월등한 능력
을 가진 세포를 뜻하는 작품 속 용어)가 ‘사랑 세포’라면 이동건의 프라임세포는 ‘변덕 세포’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변덕이 심한 편이라 지금 단정 지어 말할 순 없지만 앞서지금처럼 계속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만화를 그리겠다는 점은 변함없을 것 같아요.” 행복을 만드는 만화로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는 이동건 작가의 활동에 기대와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