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신에 몸담은 지도 어언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내가 국립 체신학교에 입학할 당시는 우리 민족의 비극인 동족상잔의 6 • 25가 한창일 때로, 수도가 부산으로 천도됨에 따라 학교도 부산으로 옮겨져 부산 남항동에 있는 판자집 가
건물에서 졸업을 하게 되었다.
1953년 8월 10일 홍안의 소년으로 처음 부임하게 된 곳이 낯선 땅 전남 장성우체국이다. 6 • 25의 참화로 청사가 소실되어 낡은 건물에 임시청사를 마련했던 관계로 근무조건이 매우 조악한 실정이었다. 내게 맡겨진 일은 통신사(기원)였으나 인원 사정으로 우편업무(운송 포함) 전반을 도맡아 겸무하게 되었는데도 공무원이라는 자긍심으로 신바람이 났었던 것 같다. 봉급이라고는 백미(안남미) 두 말이 고작이어서 하숙이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노부부가 사는 집에 사정하여 쌀 두 말을 맡기고 세끼 식사만 겨우 때웠다. 숙직실마저 없는 형편으로 차디찬 엄동설한에도 사무실 책상 위에 이불만 깔고 전보 보조원과 함께 숙직을 도맡아 해야 했다.
1953년 2월 17일 화폐 개혁으로 원이 환으로 바뀌고 휴전 이후 국민 경제는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참담하여 생활필수품의 구입은 물론 떨감 구하기가 어려워 장작값이 금값으로 치솟던 시기였다. 당시 가장 큰 애로는 철도연선 우편물 운송으로서 열차 운행이 으레 두세시간씩 연착되었기 때문에 역 구내에서 꼬박 밤을 지새우는 일이 허다하였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7월 어느 날, 시내배달을 담당하는 집배원에게 운송을 보냈더니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어 그만 결편 사고를 냈던 일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약 1년 6개월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체신인으로 태어나기 위한 매서운 담금질은 업무 처리의 요체를 터득하게 되었고, 이때 축적된 저력은 훗날 체신일꾼으로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자부한다.
1955년 2월에는 항도 목포우체국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으나 역시 청사가 소실되어 가청사에서 근무하기는 마찬가지 였으며, 직원 합숙소에서 선배들과 함께 자취를 하게 되었다. 담당업무는 다행히 주특기를 찾아 통신사로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으므로 제법 자긍심도 가질 수 있었다.
목포 전신과에서는 굉주, 목포무선, 군산 등과 연계하여 해남 • 진도 • 완도 • 무안 등지를 커버하였기 때문에 예하국을 깔보는 횡포가 심하였다.
그 후 통신사와 결별하고 서기로 전직하여 서무과 물품담당을 맡은 지 1년이 채 못되어 5 • 16군사혁명으로 병역미필자 정리 대상자로서 1961년 6월 15일 공직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나의 솔직한 심경은 당시 사회질서가 문란하고 공직사회의 부조리가 내재해 있었던 만큼 혁명구호대로 새롭고 정직한 사회 풍토가 조성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서운함보다는 유달산을 걸머지고 있다 벗어던진 둣 홀가분하였다. 그 후 1년여를 모처럼 부모님을 곁에서 모실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다행히 병역미필자에 대한 특혜로 1962년 7월 체신부에서 주관하는 5급 을류 공개채용시험에 합격, 그해 8월에 목포국에 다시 임용 발령되었다. 1963년 6월 관운이 좋았던지 4급 을류 특별승진시험에 합격되어 감독청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행정주사로 승진된 후에도 줄곧 체신청에서 심사분석담당, 교육훈련담당으로 소임을 완수하였다.
1974년 3월 임관되어 서광주전신전화국 업무과장에 보임을 받으니 노른자위에 앉게 되었다고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으나, 당시 전화적체가 심해 전화 한 대를 달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웠다. 더구나 신개발지역으로 국간전출입은 전입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2국에서 사용하고 있던 전화가 3국으로 넘어오면서 개통 순위를 기다리는 동안 옴치고 뛰도 못했으니 곳곳에서 압력, 청탁, 민원이 비등하여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거나 다름없었다. 상황이 이렇듯 어려워지니 전화승낙을 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허위서류를 조작하여 제출하는가 하면 불법매매, 불법이전 등 기발한 계략이 동원되었고, 일부는 당무자와 유착되어 묵인해 주는 등 부조리까지 발생하는 사례가 있었지만 제도 개선대책은 사후 처방격으로 뒤지기 일쑤였다. 이에 편승하여 백색가입전화(양도 가능)의 매매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만 하였다.
만2년을 불철주야 심혈을 기울였으나 보람도 없이 논산으로 좌천되는 비운을 맛보게 되었다.
공직자는 상사는 부하를, 부하는 상사를 잘 만나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결국 나의 능력 문제로 귀착시키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논산국은 과제국이지만 강경, 연무대국이 시무관 관서인지라 자국의 규모는 별반이었으나 우편집중국인데다가 장정소포가 중계되기 때문에 우편업무의 비중이 높아 신경을 써야 했다. 특히 2,500회선의 자동전화 신설공사계획이 있어 가입사무는 원만히 처리할 수 있었으나 선르 기계공사의 부실로 인하여 이용자들에게 큰 불편을 주었으며, MDF 시설을 지하세 설치함으로써 결수현상이 일어나고 습도가 높아 한여름철인데도 난로를 피워야 했으니 전화 고장이 많았다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떠나올 무렵 논산역 우편차 출입구가 폐쇄되어 우편물 운송에 불편이 커 우체국과 통운이 공동부담으로 출입문을 신조하였는데 타인의 시설에 예산 집행이 어렵다는 의견이 있어 자비로 설치한 것은 1년 3개월간의 마무리를 잘한 것으로 자위한다.
1979년 9월에는 목포전화국 업무과장으로 전보되었다. 옛집을 찾아와 외롭지는 않았으나 과제국으로서의 업무 체계가 방향을 잃고 있었다. 실무담당자들이 십여년 이상 한 자리에 눌러앉아 있다 보니 연구보다는 관행이 지침이 되어 버린 타성에 젖어 있었다. 결국 오랫동안 흐르지 않고 고인 물은 썩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당시 세인들의 지탄을 받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타가입구역의 가입전화가 방치된 채로 군사시설에 설치됐었음에도 간과하고 있었으니 한심천만이었다. 뒤늦게나마 적극적인 대응책으로 해결하였으니 다행이라 할지 모르겠다.
특히 체신부로부터 민원실 전화통일계획에 의하여 기존 가입자의 전화번호를 변경하도록 지시가 있었는데, 그 중 보건소에 지정된 4000번과 우체국장실 0004번을 변경하는 고충은 너무나 컸다. 화물 알선사 대표전화번호가 목포 2 ᅳ4000번인데 변경하면 사업의 사활이 걸려 도저히 응할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하였으나, 10개의 민원실전화번호를 동시에 변경해야 할 명제 때문에 그 중 어느 하나만을 제외시킬 수 없어 설득력을 동원해 강행했다. 이와 동시에 기계식 자동전화의 PBX군(6300번)에 수용된 기설 가입자 전화번호를 9300번으로 변경하면서 사전 양해없이 공문서 한 장으로 50여 가입전화번호를 변경함으로써 민원을 야기시켰던 업무 처리는 비록 사명감과 추진력을 좋게 평가받을 수 있을지 모르나 너무나 무모한 발상이었다고 자책자괴한다.
나주우체국 업무과장 재임 3년간은 개인 사생활면 에서나 공직생활면에서 완전 동면기였다고 자탄할 수밖에 없다. 단 한가지 보람이라면 나주시 경현동 소재 신라시대에 축조한 고사찰「다보사」에 행정전화만 가설되었을 뿐 가입구역외라 가입전화 기실이 불가하여 신도들의 집단민원이야기되었는 바, 기설된 타행정청 소유(나주군수) 선로시설(전주 21본)을 무상사용 승인을 얻어 본부에 질의, 회답을 받아 선로설비비만 징수하고 기설 행정전주를 이용하여 가입전화를 개통시켜줌으로써 오랜 숙원을 해소하였으며 기존 자원활용도 공헌한 바 있다.
1982년 1월 한국전기통신공사의 분리 전환에 따른 체신청의 기구 개편으로 전남체신청 관리과장(직영)으로 전보되었으나 현업기능은 극히 제한되었으며 청사 관리, 문서 수발, 회보 발행, 부속실 운영, 구내식당 운영 등 서무 기능 수행이 주된 업무였다.
1982년 2월 이미 해체된 상조회를 재조직하기 위하여 체신청 산하 직원들을 대상으로 의견을 수렴하여 일부 직원들의 반대를 설득으로 이해와 협력을 얻어 「전남체신청 관내 직원상조회」를 부활시킴으로써 직원 상호간의 화합 분위기 조성에 큰 몫을 해냈다고 자부한다. 이어 「전남체신청관내 관서 전화연락 운영세칙」과「전남체신청 행정자료실 운영세칙」등의 훈령을 제정하여 행정능률 향상을 도모하였다.
1984년 1월부터 1986년 6월까지 만 2년 6개월의 우무과장 재임기간은 나의 공직생활에 있어 인간의 무형 자산인 지식 • 에너지 • 시간 • 결단력 등을 모두 결집하여 이상을 현실로 접합시켜 꽃피우게 한 전성기였다고 자부하고 싶다. 친절봉사자세 확립, 창구환경 개선, 집배구 조정, 편지쓰기운동, 우취인구 저변 확대를 위한 제1회 남도우표전시회 개최, 문패게시운동 전개 및 우편수취함 설치운동 등 우편업무 전반에 걸쳐 전력투구했던 것이다. 그 결과 본부 선정 1984년도 우수체신청, 1985년도 최우수청의 영예를 안게된 것은 최대의 수확이었다고 생각한다.
임관 후 줄곧 12년을 보조기관에서만 일하다가 1986년 6월 14일에 처음으로 일선 현업기관장인 화순우체국장으로 자리를 옮겨 경험이 부족하고 부덕하였으나 주민들이 감싸주고 성원해 주었으며 직원들 모두가 성심껏 따라주어 대과없이 떠나오게 된데 대하여 고맙게 생각한다.
지난해 7월 2일에 곡성우체국으로 전보된 지도 벌써 7개월. 뜻과는 달리 뚜렷이 이루어 놓은 일없이 반년을 허송한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나는 공직생활 동안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의 신상문제를 거론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그것은 순리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순국 재임 2년을 앞두고 떠나겠다는 의사표시를 했기 때문에 이곳 곡성국은 희망지가 된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