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박함이 담긴 1,100여 통의 편지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어린 시절 의욕과 야망이 없고 친구들과 다툼이 일상인 소위 말하는 문
제아였지만, 글과 역사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그는 졸업 후 자신의 장점을 살려 종군기자로 활동하고 책
도 쓰면서 대중적인 관심을 끌었다. 종군 기자 시절, 파견지에서 적군의 포로로 잡혔다가 극적으로 탈출
한 처칠의 이야기가 신문에 실리면서 더욱 유명세를 얻었다. 이를 발판 삼아 정치에 입문한 처칠은 해군장
관, 재무 장관을 거쳐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총리를 역임하던 처칠은 연합군의 승리를 위해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는 제1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아물지 않아
영국의 요청을 망설이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처칠은 루스벨트를 설득하기 위해 약 1,100여 통의 편지를 보내기에 이르렀으며, 루스벨트 또한 780여 통의 답신으로 회답했다.
루스벨트 대통령께.
우리의 목적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이 섬에서 끝까지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청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개개인의 실력 면에서 뛰어나므로 공중전에서 그들의 뒤를 바짝 뒤쫓을 수 있습니다. 만약 반대의 결과를 얻는다면 현 정부 구성원은 그 과정에서 무너질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항복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현 정부 구성원이 쓰러지고 그 폐허에 다른 이들이 나타난다면, 대통령께 남은 협상 카드는 오직 함대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만약 미국에 의해 이 나라가 그런 운명에 처한다면, 살아남은 거주자들을 위해 가능한 한 최고의 조건을 조성해 준다고 해서
그 책임감 있는 이들을 비난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을 것입니다.
처칠이 루스벨트에게 보낸 편지
21세기 들어 가장 중요한 편지로 손꼽혀
처칠의 끈질긴 구애 끝에 루스벨트는 영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끄는
데 일조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처칠과 루스벨트가 몇 달 동안 주고받은 글은 21세기 들어
가장 중요한 편지로 손꼽힌다. 더불어 처칠과 루스벨트는 서로를 정치계 동반자 그 이상으로 생각했다.
두 사람은 1943년 모로코 별장에 함께 묵으며 석양을 지켜봤다. 이후 처칠은 모로코 풍경을 담은 ‘쿠투비아
모스크의 탑’이란 그림을 그려 루스벨트에게 선물했다. 이 그림은 처칠이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동안 그린 유일한 그림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영국 런던의 부촌 메이페어(Mayfair)에는 처칠과 루스벨트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서로를 정겹게 바라보는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은 루스벨트와 처칠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위기를 함께 극복해낸 세기의 친구였음을 상징하고 있다.
참고도서 우편함 속 세계사(사이번 시백 몬티피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