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으로 피자를 주문하다
‘파파존스 라지 피자’ 2판은 역사상 가장 비싸게 팔린 피자다. 현 시세로 1240만 달러(한화 약 142억 원)에 팔렸으니 피자 1판이 무려 71억 원. 피자 조각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1억 원이 뱃속으로 들어간다. 피자를 구입한 주인공은 미국 플로리다 주 잭슨빌에 사는 ‘라스즐로 핸예츠’라는 프로그래머였다. 라스즐로는 2010년 5월 18일 한 온라인 게시판에 피자 2판을 배달해주면 비트코인 1만 개(1만 비트코인·10000 BTC)를 주겠다는 글을 올렸다. 당시 비트코인은 막 유통되기 시작한, 쉽게 말하면 싸이월드의 ‘도토리’나 카카오톡의 ‘초코’ 같은 가상화폐였다. 1만 비트코인은 41달러였고 라지 피자 2판 가격은 30달러였으니 상대방으로선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직접 피자를 만들어서 우리 집으로 가져다줘도 좋고, 피자집에 주문만 해도 좋습니다. 저는 다만 제가 가진 비트코인으로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지를 알고 싶거든요.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주문하는 것처럼 말이죠. 피자 위에는 양파, 고추, 소시지, 버섯, 토마토, 페퍼로니같은 평범한 재료들이 올라갔으면 좋겠고 생선살 같은 이상한 토핑은 사양하겠어요.” 나흘째인 5월 22일 라스즐로는 제르코스(Jercos)로부터 피자를 받았다며 인증사진을 올렸다. 한 여자아이가 테이블 위에 놓인 피자에 손을 뻗고 있었다. 비트코인으로 현물을 구입한 최초의 사건. 전 세계 비트코인 유저들은 이날을 ‘피자데이’라고 부른다.
컴퓨터 ‘덕후(마니아)’들의 장난으로 시작했던 피자 사건 이후 비트코인 가격은 급등했다. 1센트도 안 됐던 1비트코인은 2011년 2월 1달러가 됐다. 2013년 12월 초에는 1151달러까지 찍었다. 상승세는 거기까지였다. 비트코인은 바닥도 모르고 떨어지기만 했다. 2015년 1월 177달러에서 겨우 하강을 멈추고 한동안 200달러 선을 유지했다. 2014~2015년은 비트코인의 ‘암흑기’였다. 경제학자들은 17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불었던 ‘튤립 투기 열풍’이 재현된 것이라고 단언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과 투자자 워런 버핏은 대표적인 비관론자였다.
2009년 1월 탄생한 비트코인이 8년을 버티리라고 믿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비트코인은 또다시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금(2017년 3월 13일 기준) 1비트코인 가격은 1240달러, 한국에서는 147만1000원에 거래된다. 1만 비트코인을 주고 구입한 피자가 이제는 수백억 원짜리가 된 이유다.
비트코인 탄생(2009년1월)이후 최근까지 비트코인 가격 변화 그래프
자료 : 블록체인인포 https://blockchain.info
삼성, 도시바, 모토로라의 합작품?
비트코인 개발자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2008년 10월 ‘비트코인 : 개인 대 개인의 전자화폐 시스템(Bitcoin: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 이라는 논문이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가명으로 발표됐는데 이 논문 안에 비트코인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물론 당시만 해도 이 논문에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한동안 비트코인은 사토시 나카모토 한 사람에 의해 발행됐다. 초창기 비트코인은 소수의 프로그래머 사이에서 회자됐다. “누가 어떻게 이런 화폐 시스템을 구축했을까” 하는 프로그래머들의 경외감과 탄식이 발단이었다.
논문의 창의성과 논리성, 완벽성 덕분에 비트코인 개발자는 한 개인이 아니라 집단일 수도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하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보니 항간에는 ‘SA(삼성)/TOSI(도시바)/NAKA(나카미치)/MOTO(모토로라)’ 등 4개 기업이 만든 가명이 아니냐는 설도 제기됐다. 지난해에는 호주의 한 공학자가 자신이 사토시 나카모토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비트코인은 ‘금’처럼 채굴해 쓴다. 컴퓨터를 이용해 복잡한 계산식을 풀면 새로운 비트코인이 만들어지는데 가장 먼저 계산식을 푸는 단체나 개인에게 해당 비트코인이 지급된다. 비트코인 유저들은 이를 ‘채굴한다’고 말한다. 초창기에는 채굴이 쉬워서 라스즐로 같은 이들이 일반 컴퓨터로 채굴에 뛰어들었는데, 이제는 계산식이 복잡해져서 전문적으로 채굴하는 집단이 등장했다.이들은 컴퓨터 수백 수천 대를 연결해 비트코인만 채굴한다. 하천에서 사금을 채취하던 장삼이사들이 사라지고 전문 금 채굴업자들이 나선 격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채굴할 수 있는 금의 양이 줄어드는 것처럼, 비트코인도 채굴 ‘반감기’가 있도록 프로그램됐다. 초창기만 해도 한 번에 50비트코인을 채굴할 수 있도록 했다가 2012년 11월부터는 절반인 25비트코인으로 줄었다. 지난해 7월부터 1회 채굴량은 12.5비트코인으로 감소했다. 2020년이 되면 다시 절반으로 줄어든다. 현재 1620만 개의 비트코인이 채굴됐고 앞으로 2100만 개까지만 채굴된다.
사토시 나카모토가 비트코인에 금의 특성을 집어넣은 까닭은 인위적인 ‘인플레이션(돈의 가치가 떨어지고 물가가 오르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국가는 화폐를 독점 발행해 이윤을 챙기고 국가 경제를 관리한다. 경기가 침체기라면 시장에 돈을 풀어서 경기를 회복시키고, 국가 빚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면 돈을 찍어내기도 한다. 시장에 돈을 풀든, 돈을 찍어내든 그때마다 돈의 가치는 떨어지는데 이를 소유한 개인은 손해를본다. 예컨대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은 1921년 5월 막대한 양의 전쟁배상금을 영국과 프랑스에 지급해야 했다. 독일 정부는 돈을 찍어내 배상금을 마련했고 독일 마르크화의 가치가 폭락했다. 1921년 1월 0.3마르크였던 신문 한 부가 1922년 11월 7000만 마르크가 됐다. 지갑에 돈이 있어도 살 수 있는 물건이 없었다.
국가가 화폐를 통제하는 상황에서는 이런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진다. 환율 조작, 금리조정, 양적완화(중앙은행이 통화를 시중에 직접 공급해 경기를 부양시키는 통화 정책) 같은 정책이 반복될 때마다 돈의 가치가 출렁대는데 비트코인은 이런 배경에서 커 나갔다. 2008년 금융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 정부는 양적완화로 달러를 풀기 시작했고 달러 가치는 떨어졌다. 사람들은 중앙정부가 돈을 찍어내며 인위적으로 인플레이션을 만드는 상황에 대해 불만을 갖고 달러를 팔았다. 대신 금이나 금과 유사한 성격의 비트코인을 보유하기 시작했다. 최근 몇 년 비트코인 가격이 급등한 이유도 중국 위안화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비트코인으로 눈을 돌린 중국인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중앙정부의 금융시스템이 불안정한 개발도상국에서 사람들은 자국 화폐 대신 비트코인을 사두기도 한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피자.
최초로 비트코인으로 지불된 파파존스 라지사이즈 피자 2판
사진 출처 : 헬리아칼(heliacal) 게시판 캡쳐 (http://heliacal.net/~solar/bitcoin/pizza)
‘무정부주의자’들의 화폐
금융시스템은 중앙은행이 화폐 발행을 독점하고 은행을 이용해 이를 관리·통제하는 방식으로 이뤄져 왔다. 하지만 비트코인은 네트워크에 접속한 개개인들의 컴퓨터를 통해 공동으로 관리·통제된다. ㄱ의 돈이 ㄴ에게 송금됐다. 은행이라면 ㄱ과 ㄴ의 장부에만 이 거래기록을 적어두고 은행이 장부를 관리한다. 은행이라는 중앙시스템의 권위가 장부의 진위를 결정한다. 반면 비트코인 시스템에서는 네트워크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ㄱ과 ㄴ의 거래 내역을 자신의 장부에 똑같이 기록한다. ㄷ의 장부에도 ㄱ과 ㄴ의 거래가 기록되고, ㄹ의 장부에도 ㄱ과 ㄴ의 거래가 기록되는 식이다. 이 모든 절차는 시스템상에서 자동으로 이뤄진다.
ㄱ,ㄴ,ㄷ,ㄹ 등 비트코인 사용자들은 10분마다 모여 서로의 거래 장부를 검사한다. 전체 비트코인 사용자 중 절반 이상이 인정한 장부가 진본이다. 진본을 대조해 숫자가 잘못 적히거나 누락된 장부가 있으면 진본을 복사해대체한다. 비트코인 장부를 위조하려면 네트워크상에 있는 절반 이상의 컴퓨터가 가지고 있는 장부를 동시에 수정해야 하는데 현존하는 슈퍼컴퓨터 수백 대를 갖다놓고 해킹에 동원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개개인이 갖고 있는 장부에 전 세계 비트코인 거래 내역이 모두 기록되다 보니 계좌(공개키)만 알면 그 계좌에서 이뤄진 모든 거래 내역을 알 수 있다. 온라인(https://bitcoin.org)에서 비트코인 지갑을 내려받으면 공개키와 비밀키가 생성된다. 다른 사람과 비트코인을 주고받을 때는 공개키를 이용한다. 키는 숫자와 알파벳의 조합으로 이뤄져 있다. 예컨대 ‘125ytYsnZwdEVV6YZVfx1NZ Uqc9GY45FBm’와 같은 식이다. 블록체인인포(https://blockchain.info)사이트에서 이와 같은 계좌를 입력하면 거래 내역을 조회할 수 있다. 보낸 이의 계좌(공개키), 금액, 보낸 시간, 지역 등은 공개되지만, 그 계좌 주인의 실명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비트코인으로 생활하기
https://bitcoin.org
아직 화폐로서의 비트코인이 가야 할 길은 멀다. 몇몇 국가에서 비트코인을 화폐로 인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비트코인을 ‘화폐’로 쓰기보다는 금처럼 가치 저장용으로 사용한다. 화폐로서 유통이 활발해진다면 ‘돈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다. 실제로 이를 실험한 기자들이 있다. 미국에서는 2013년 5월 <포브스>지 기자가 ‘비트코인으로 일주일간 살기’를 시도했다. 당시 그가 살고 있던 샌프란시스코에서 비트코인을 받는 식당은 컵케이크 가게와 스시집 딱 두 군데 뿐이었다. 일주일간 케이크와 스시만 먹고살 뻔한 그를 구한 건 온라인 음식배달업체 ‘푸들러(Foodler.com)’였다. 한국으로 치면 ‘요기요’나 ‘배달통’ 같은 업체다. 푸들러는 비트코인으로 결제가 가능했고, 덕분에 다양한 음식들을 주문해 먹을 수 있었다. 이후 미국에서 ‘비트코인으로 생활하기’는 조금 더 수월해졌다. 온라인 쇼핑몰 ‘기프트(Gyft.com)’를 이용하면 나이키, 던킨도너츠, 월마트, 도미노피자 등에서 사용이 가능한 기프트카드를 비트코인으로 구입할 수 있다.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 2016년 10월 <매경 이코노미>기자가 비트코인을 받는 것으로 알려진 수도권 35개 매장을 찾았다. 모두 거절당하고 단 두 곳(피자 가게와 카레전문점)에서 “눈물 젖은 끼니를 때웠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점주들은 “손님이 안 쓰다 보니 비트코인 결제를 포기했다”고 했다.
이 가상화폐의 미래를 단언키는 어렵다. 지금까지 비트코인에 ‘총 120번의 사망선고가 내려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관론이 여전하고, ‘그럼에도 아직까지 살아남지 않았느냐’는 낙관론도 만만찮다. 다만 비트코인이 지금 화폐로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순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짜릿한 일이다.
비트코인은 비트코인 거래소 홈페이지에서 원화로도 구입할 수 있고, 0.00000001 BTC(=1사토시) 단위로도 살 수 있으니 재미 삼아 구입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사용자가 많을수록 비트코인 결제가 가능한 곳이 늘어날 것이고, 사놓은 비트코인의 가치가 운 좋게 오를 수도 있다.
5월 22일마다 비트코인이 가능한 피자집에서 피자 한 판을 주문해보는 것은 어떨까? 사실 모든 위대한 역사는 우연하게, 장난처럼 시작되지 않나. 다만 투자를 목적으로 하겠다면 극구 말리고 싶다. 아직까지는 언제든 ‘와르르’ 무너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가상화폐’다.
작가소개 이재덕 기자
경향신문 기자. 기획재정부, 공정거래위원회, 농림축산식품부, 한국은행, 시중은행, 카드사 등에 출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