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가쁘게 달려온 지도자 이을용의 2015년
성큼 다가온 연말 분위기로 몸과 마음이 들뜨는 12월의 어느 날, 청주대학교 인근 한 카페에서 이을용 코치와 마주했다. 다소 쌀쌀한 날씨에도 가벼운 트레이닝복을 입은 이 코치는 은퇴한 지 5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현역 못지않은 날렵한 몸매와 눈빛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올 한 해 청주대학교 축구팀와 청춘FC 두 팀을 맡아 유독 바쁘게 보냈다는 그는 새롭게 시작된 지도자로서의 삶에 감사하고 있다며 첫 운을 뗐다.
“선수로 뛸 때보다 더 많이 공부해야 하고 지도하는 선수들의 개인적인 어려움 등 심적인
면까지 모두 살펴야 하는 점은 부담되기도 하지만 내가 가르친 선수들의 실력이 점점 늘어가는 것을 느낄 때의 뿌듯함은 현역 때의 성취감과 또 다른 행복이더군요.”
그는 올해 1월부터 청주대학교의 코치직을 맡아 대학축구팀 간 리그인 U리그 2권역(대전, 충북)에서 8전 전승을 기록, 조민국 감독과 함께 부임 첫 해 우승을 일궈내는 기염을 토했다. 여타 명문 대학팀에 비해 다소 열세라고 평가되던 청주대를 이끌고 따낸 이 코치의 전승 우승은 ‘스타선수는 스타 지도자가 될 수 없다.’ 는 통념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나를 닮아 아픈 손가락 ‘청춘FC’
더불어 이 코치는 올해 여름, 절친한 친구이자 같은 2002월드컵 동료인 안정환 감독과 함께 KBS에서 방영된 ‘청춘FC’라는 팀의 공동감독을 맡았다. 이미 청주대학교 코치로 부임한 이후였지만 안 감독에게 현실의 벽에 부딪혀 축구선수로서의 꿈을 접어야만 했던 이른바 ‘축구 미생’들의 어려운 사연을 전해들은 이 코치는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단 몇 개월간의 짧은 인연이었지만 청춘FC 선수들을 지도하며 그는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고 말했다. “청춘FC 선수들과 함께 지내면서 제자들이지만 저 또한 그들에게 배운 점이 많습니다. 힘들었던 지난날의 제 모습을 다시 떠올리면서 선수들에게 더 애정이 갔고 조금은 안일해진 제 마음도 다 잡게 되었죠.”
이 코치 또한 2002년 월드컵 당시 어려운 환경 탓에 선수생활을 접고 공장 노동자로 일했던 일화가 세간에 많이 알려졌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축구의 열정을 품고 그라운드로 돌아와 당당히 4강신화의 주역이 되었고 국민들에게 더욱 많은 격려와 사랑을 받았다. 과거 자신과 닮은 그들의 모습에 더 마음이 쓰이고 어느 제자들보다도 아픈 손가락이라는 청춘FC 선수들. 그와 안 감독은 방송이 끝난 지금도 꾸준히 연락을 이어오고 있으며 그들이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아직도 꿈만 같은 2002년의 여름
“제 현역 최고의 순간이요? 두말할 것도 없이 2002년 월드컵이죠. 아직도 그때 제 모습을 담은 영상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거든요.”
본인의 말처럼 이 코치는 한국 축구가 4강 신화를 이룬 2002년 한일 월드컵 출전을 계기로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국민들에게 확실히 각인시켰다. 우리 대표팀의 대회 마지막 경기였던 터키와의 3,4위전 당시 이 코치가 터뜨린 마법과도 같은 왼발 프리킥 골은 한일 월드컵 최고의 골 중 하나로 전 세계 외신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으며 황선홍의 폴란드전 첫 골, 안정환의 미국전 동점 헤딩골 역시 그의 왼발에서 비롯됐다. 그는 대회 기간 중 1골 2도움을 기록, 대표팀 최다 공격포인트(득점 혹은 도움 횟수)를 기록하며 이를 발판으로 터키리그에도 진출하는 등 성공적인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이후 K리그로 돌아온 이 코치는 2011년 고향팀 강원FC에서 은퇴, 정든 그라운드를 떠났다.
13년 전 당시 대표팀 막내였던 차두리, 이천수 두 선수도 모두 올해 그라운드와 작별을 고했다. 한국 축구 최고의 황금 세대로 불리던 2002년 월드컵 멤버들이 모두 그라운드를 떠나고 있는 지금의 소회를 물었다.
“2002 월드컵 멤버들과는 아직도 1년에 한 번 모임을 갖는데요, 그때마다 함께 나누는 생각이 있어요. 선수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지금, 그동안 받은
사랑과 응원을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이죠.”
“2011년 은퇴하는 순간까지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대한민국의 축구선수로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제가 받은 사랑을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싶어요. 그것이 제 지도자로서의 몫이고 국민들이 주신 사랑에 대한 보답이라고 믿습니다.”
고비를 넘어야 성장할 수 있다
경제 불황으로 취업난이 계속되는 어려운 시기를 맞아 고민하고 아파하는 청춘들에게 전하고픈 한마디를 물었다.
“대학에서 젊은 청춘들과 가까이 지내다 보니 일반 대학생들과도 얘기할 기회가 많아요. 취업이다, 스펙이다 이리저리 고민이 많더군요. 제가 4학년 선수들을 졸업시켜 상위 팀에 보낼 때 늘 당부하는 말이 있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운동장을 떠나지 말라’는 이야기죠. 저도 힘든 현실에 좌절해 운동을 접고 다른 일을 해봤지만 결국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은 축구였어요. 운동이 아무리 힘들어도, 실력이 늘지 않아 답답해도 내가 꾸준히 해오던 축구만큼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죠.”
젊은 시절이란 으레 성과를 손에 쥐기 어려운 법. 이을용 코치는 그 자리에 묵묵히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기는 것임을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한 우물을 파라는 말, 요즘 시대에 맞지 않는 식상한 말일수도 있지만 어려움과 마주했다고 해서 피하고 나아갈 방향을 바꾸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비를 넘어야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꾸준함과 성실함 만큼은 절대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2016년 새해 우정가족을 비롯, 모든 국민들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며 인사를 나눈 뒤 다시 휘슬을 물고 그라운드 위 선수들을 독려하는 그에게 다시 한 번 응원을 보낸다.